김준의 어촌정담(漁村情談) ③ 불 꺼진 항구, ‘파시의 흥’이 다시 올까
김준의 어촌정담(漁村情談) ③ 불 꺼진 항구, ‘파시의 흥’이 다시 올까
  • 김준 작가
  • 승인 2018.05.21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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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고흥군 봉래면 축정마을

[현대해양] 불금을 하루 앞둔 목요일 이른 저녁 축정항, 위판장 구석에서 어머니들이 바지락을 가득 부어 놓고 추리느라 바쁘다. 바지락 크기가 장난이 아니다. 흔히 시장에서 본 바지락 두 배 크기다. ‘무슨 바지락이 이렇게 크다요’ 라고 물으니 ‘물바지락도 모르요’라고 한다. 옆에 트럭에는 갈무리한 바지락을 차곡차곡 실리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다시 축정마을로 향했다.

위판장의 새벽 모습이 보고 싶었다. 작고 아담 하지만 갑오징어, 문어, 광어, 주꾸미, 장대, 꽃게 등 철을 맞은 바닷물고기들이 수족관에 담겨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새벽 물을 보고 건져 온 것들이다. 대부분 부부가 조업을 하고, 큰 배는 외국인도 한 둘씩 눈에 띄었다.

축정항은 외나로도에 있는 가장 큰 어촌 축정마을에 있는 포구이다. 전라남도 고흥군 봉래면에 있는 마을이며, 여수와 거문도를 오가는 배의 중간기착지이다. 고흥반도 끝자락 동쪽에 위치한 외나로도는 ‘나로우주센터’가 건설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내나로도와 함께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며, 연륙교와 연도교로 고흥반도와 연결되어있다.


일제강점기 수도와 전기 전화시설 갖춰

‘축정항’은 축정마을 앞에 위치한 쑥섬(애도)과 사양도, 외도와 내도에 둘러싸여 큰 파도를 막아주고 수심도 깊어큰 배가 접안할 수 있는 천연어항이다. 그 밖으로 여수시에 속하는 소리도와 거문도(고도), 초도를 아우르는 바다는 황금어장으로 조선시대 대마도 비롯한 주변국가에서 탐내던 바다였다.

실제로 대마도 어민들이 거제 지세포에서 허가증을 받아 ‘고초도’ 어장까지 건너와 조업을 하고 돌아간 기록이 있다. 일제가 이곳을 수산물수탈 전초기지로 삼았던 것도 좋은 어장과 좋은 어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축정항은 도로 포장은 물론 운반선이나 어선에 필요한 제빙공장이 들어섰다. 여기에 상수도시설과 전화와 자가발전 전기시설까지 갖추었다.

당시 일본인 수산업자들 사이에는 ‘축정을 모르면 뱃사람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선창에 일본식 2층집이 즐비했고, 일본인 500여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으로 이주한 일본인 수산업자와 어민을 중심으로 나로도어업조합(1923)이 설립되었다. 섬에 전기가 공급된 것이 1970년대 초반이었으니 당시 축정항의 번성함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축정항에는 인근 해역에서 잡은 참치잡이 배들이 많았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참치는 ‘조선 사람이 먹기는아깝다’며 잡히는 대로 일본으로 실어갔다. 이곳 어장에서 잡은 생선은 수심이 깊고 물이 깨끗해 맛이 좋고 비린내가 적어 최상품으로 꼽혔다. 가을이면 수백 척의 배들이 모여 들었다. 일본인을 위한 신사, 유곽, 술집, 목욕탕 등도 들어섰다. 모습은 바뀌었지만 지금도 당시 일본풍의 가옥이 남아 있다.


파시로 흥청되던 마을, 축정항

해방과 전쟁이 지난 후 축정항은 어청도, 흑산도, 청산도, 성산포, 거문도 등 11개의 포구와 함께 어업전진기지로 지정되었다. 1960년대 중반이다. 당시 삼치철인 10월 한 달은 축정항이 흥청댔다. ‘나로도로 돈이 다 몰린다’는 말이 돌았고, 이곳 학생들은 ‘교복 단추를 금으로 한다’고 소문이 났다.

남획인지 수온 탓인지 아니면 서식환경이 바뀐 것인 지 삼치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 자리를 지켜 준 것은 새우였다. 이후 나로도항을 들고나는 배는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하루 100여 척씩 드나들던 배들이 몇 년 사이에 10여척으로 급속히 감소했다. 삼치파시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197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연근해 어장이 고갈로 되자 뱃사람들은 더 큰 배와 더 긴 그물을 갖춰 먼 바다로 나가야 했다. 그 사이 수산물 유통은 생산지에서 대량소비지 인근 항구로 이동했다. 축정항을 이용하던 배들은 육상소비지와 가까운 여수항, 목포항, 심지어는 부산항을 이용했다. 축정항에 선적을 둔 선주들도 대도시 인근 항에서 위판을 하고 출어준비까지 마친 후 잠깐 축정항에 들리고 있다.

지금도 8월말부터 12월까지는 삼치가 절정이다. 여수를 비롯해 남해 먼 바다에서 같은 시기에 참지를 잡지만 나로도 참치는 특별해 인기가 높다. 맛도 맛이지만 대나무에 낚싯줄을 매어서 잡는 ‘끌낚시법’ 때문이다.

▲ 건조중인 갑오징어

안강망에서 고대구리로, 그리고...

1980년대 초반 나로도 수협조합원은 700여 명, 안강망 배가 50여척, 유자망배는 70여 척에 달했다. 여전히 어업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축정마을에서 만난 칠순의 김씨 이야기다.

“우리들이 안강망 구신들이여 우리들이 59년생이여. 안강망은 목포로 여수로 여기도 많았어. 인천도 많았고. 그것이 동지나 남지나 제주에서 열 몇 시간 두들고 나가. 바다하고 하늘하고 갈매기들이나 보고, 노상 잡는 것은 갈치제.”

김씨는 먼 바다로 삼치대신 갈치를 잡으로 나갔다. 열일곱에 안강망 배를 타기 시작했다. 위도와 흑산도에 갔을 때 그곳에 술집들이 즐비한 무법천지였다고 기억했다. 고기도 잡히지 않고 정권이 바뀌면서 정화작업이네 뭐네 하면서, 맘대로 할 수 있었던 고기잡이도 여러 가지 규제로 어려워지자 남아 있던 술집들도 하나둘 정리하고 떠나기 시작했다.

안강망어업이 한창일 때 고흥에서 제일 부자 마을이 축정항 맞은 편 쑥섬(애도)이었다. 지금은 10여 가구가 살고 있지만 당시 500여 명이 거주하고, 가구마다 대부분 안강망 배들을 갖고 있었다. 외지에서 배를 타러온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어, 셋방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곳에 다방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곳의 50대 주민들 중 안강망 배를 타지 않는 사람들이 없다. 돈 있는 사람들은 빚을 내서 큰 배를 지어 갈치잡이에 나섰다. 하지만 갈치는 잡히지 않고 불법어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잘나갔던 많은 지역 선주들이 백수가 되었다. 큰배를 부릴 수 없게 되자 그 자리를 고대구리배(소형기선저인망)들이 들어찼다.

고대구리배가 30여 년 동안 축정항에 생선을 공급했다. 지금 고대구리배를 부렸던 어민들은 답답하다. 엄남마을 송씨는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한 자식들이 둘이나 있다. 정부가 어업자원 보호와 불법어업 근절을 위해 ‘싹쓸이 어업’의 대명사로 지목된 소형기선저인망을 폐선조치 했기 때문이다.

보상을 해주었지만 부채를 안고 배를 마련한데다 대출을 받아 어구를 준비했기에 돈이 들어오기 전에 빚잔치가 되고 말았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나이는 들었지만 새우조망이라도 해 볼까 했는데 한·중, 한·일어업협정으로 어장이 축소되어 연안으로 몰려드는 어선들과 경쟁해야 한다.

 

나로도 ‘물바지락’이다

봄철 축정항은 갑오징어와 주꾸미 그리고 바지락이 지킨다. 과거처럼 흥청대지는 않지만 맛을 아는 사람들은 주문이 이어진다. 특히 물바지락이 인기다. 나로도 사람들에게 바지락은 특별하다. 내나로도 덕흥마을은 아예 ‘바지락마을’이라 부른다. 물이 빠진 후 캐는 ‘참바지락’과 달리 내내 물에 잠긴 깊은 바다에서 배로 끌어서 바지락을 긁는 ‘물바지락’으로 구분한다. 고흥은 갯벌이 좋다.

덕흥마을만 아니라 이웃한 남성리 그리고 외나로도에도 창포, 중창, 교동, 외초마을 갯벌에서도 바지락이 많이 난다. 특히 고흥반도와 내나로도, 내나로도와 외나로도 수로에 물바지락이 유명하다. 간혹 마을에 바지락을 까서 생으로 말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옛날에는 꼬챙이에 깐 바지락을 키워 말렸다. ‘바지락꼬지’라 했다. 나로도 사람들에게 최고의 음식이자 도시락반찬이고 술안주였다.

채취해 온 물바지락은 먼저 껍질이 깨진 것과 작은 것을 골라낸다. 그리고 비닐봉투에 바닷물과 함께 담아 묶는다.마지막으로 갈무리한 바지락을 아이스박스에 담은 뒤 얼음을 채워 밀봉을 한다. 이렇게 보내며 날씨와 관계없이 상하지도 않고 또 소비자가 주문한 바지락을 받을 때면 자동적으로 해금까지 되니 바로 조리를 할 수 있다. 겨울부터 봄까지 물바지락 작업이 이어진다.

▲ 봉래산 편백나무

나무의 소리를 듣고자 하면 나무가 돼라

여수에 속하는 손죽도, 초도, 거문도 등 다도해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축정항 근처에 가볼만한 곳으로 전라남도 민간정원 1호 ‘쑥섬’을 권한다. 축정항에서 배로 5분도 걸리지 않는다. 김상현, 고채현 부부가 가꾼 ‘별정원’과 작고 고즈넉한 마을숲길이 좋다. 또 가볼 만한 곳으로는 봉래산 편백숲이다. 삼나무와 함께 편백나무는 일제강점기에 심어졌다.

봄철이면 복수초 군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봉래산 정상에는 봉화대가 있고 다도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숲이 좋고 바다가 좋은 곳은 인간보다 먼저 바닷물고기가 자리를 잡았다. 이젠 바닷물고기가 사라지고 있다. 이청득심(以廳得心)이라 했다. 나무의 소리를 듣고 싶으면 나무가 되라했다. 나무의 소리를 들으면 바닷물고기를 부르는 소리가 들릴지 모르겠다.

Profile 김준 작가

어촌사회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고, 지속가능한 어촌과 어업, 주민이 행복한 섬마을과 지속가능한 섬살이에 관심을 갖고 있다. 광주전남연구원에서 섬정책, 어촌정책, 지역관광, 지역문화 정책을 마련하는 일을 하고 있다. 쓴 책으로 섬살이, 섬문화답사기, 어촌사회학, 바다맛기행, 어떤 소금을 먹을까, 물고기가 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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