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43
월간현대해양·이주홍문학재단 공동기획 향파 이주홍과 해양인문학이야기 43
  • 남송우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22.01.17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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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숲』에 실린 향파의 일기가 지닌 문화사적 의의 (2)
《석주명의 나비 이야기》 표지
《석주명의 나비 이야기》 표지

[현대해양] 문인에게 있어서 일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처럼 읽힐 때가 있다. 그의 삶이 그의 작품 속으로 내밀하게 스며들기도 하고, 작품 활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품 활동의 또 다른 측면을 읽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향파 선생의 1939년 8월 16일 자 일기는 ‘永昌書館에서 소설장정 대금 10圓을 받고, 秀英社精版社에 가서 石版글씨를 써주었다’라고 적고 있다. 영창서관으로부터 받은 소설장정 대금은 이미 8월 8일 날 일기에 나왔듯이 영창서원으로부터 부탁받은 소설 『深苑의 長恨』 표지화 그림에 대한 대금으로 보인다. 이 10원의 가치는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 될까? 1930년대 쌀 한 가마(80kg)가 13원이였다고 하니, 지금의 약 16만 원 정도로 계산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당시의 1원은 지금의 1만 2,300원 정도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향파가 소설집 한 권의 장정을 그려주고 받은 대금은 지금으로 치자면 12만 3,000원 정도가 되는 셈이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금액으로 볼 수 있다.

8월 23일 자 일기에는 ‘新世紀社에서 노춘성을 만난 뒤 그에게 끌려 중국요리집 又春館에 가서 점심 대접을 받았다. 도중에선 함대훈, 이헌구씨를 만나 차 마시고, 이발을 하다가 머리에 흰털 하나가 나 있단 말을 듣고 놀랐다. 조광에서 고료를 받고 오는 길에 계용묵 형을 만나 차를 마셨다.’ 여기에 나오는 신세기사는 1938년에 창간한 예술종합잡지사를 말한다. 향파가 신세기사에 왜 들렸는지는 밝히고 있지 않지만, 종합잡지사이기에 원고나 출판에 관련된 일이 있어서 방문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노춘성을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노춘성은 누구인가? 그는 노자영을 말한다. 노자영의 호가 춘성이었다. 그는 1898년 황해도 장연(長淵)(또는 송화군(松禾郡))에서 태어난 시인, 수필가로 활동한 이다.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의 양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한 적이 있으며, 1919년 상경하여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에 입사하였다. 이때 『서울』·『학생』지의 기자로 있으면서 감상문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1925년경 도일하여 니혼대학(日本大學)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였으나 폐질환으로 5년간을 병석에서 보냈다고 한다. 오랜 병상에서 일어나 1934년 『신인문학(新人文學)』을 간행하였으나 자본 부족으로 중단하였다. 1935년에는 조선일보사 출판부에 입사하여 『조광(朝光)』지를 맡아 편집하였고, 1938년에는 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청조사(靑鳥社)를 직접 경영하기도 했다.

작품 활동은 1919년 8월 《매일신보》에 「월하(月下)의 몽(夢)」이, 같은 해 11월에 「파몽(破夢)」·「낙목(落木)」 등이 계속 2등으로 당선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 뒤 1921년 『장미촌』, 1922년 『백조』 창간 동인으로 가담하여 『백조』 창간호에 시작 「객(客)」·「하늘의 향연(饗宴)」·「이별한 후에」를 발표하였고, 이어 『백조』 2호에 「우연애형(牛涎愛兄)에게」라는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다. 시·수필뿐만 아니라 1923년에는 소설 「반항(反抗)」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첫 시집 『처녀(處女)의 화환(花環)』을, 1928년에는 제2시집 『내 혼(魂)이 불탈 때』, 1938년에는 제3시집 『백공작(白孔雀)』을 간행하였다. 기타 저서로는 3권의 시집 외에 시극·감상문·기행문 등을 모은 『표박(漂泊)의 비탄(悲嘆)』(1925), 소설집 『무한애(無限愛)의 금상(金像)』(1929)·『영원(永遠)의 몽상(夢想)』(1929), 수필집 『인생안내(人生案內)』(1938) 등이 있다.

그의 시는 낭만적 감상주의로 일관되고 있으나 때로는 신선한 감각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산문에서도 소녀 취향의 문장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한 수필가였다. 향파 선생이 당시 이러한 선배 문인의 청을 뿌리치기는 어려워 그와 함께 중국 요리집으로 가서 점심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우춘관은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음식점이다. 우춘관의 석 사장은 이 요릿집을 운영해서 돈을 많이 벌어 당시 독립군의 자금으로 대어주었다고 한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 고초를 너무 많이 겪어 집을 떠나 떠돌이처럼 생활했다고 전한다. 바로 이 우춘관의 석 사장의 아들이 그 유명한 나비 박사인 석주명이다.

석주명은 1908년 11월 13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일 당시 보통학교 학생이었던 석주명은 “대한 독립 만세” 소리가 들려오자 거리로 뛰쳐나가 시위 행렬에 동참했다고 한다. 민족의 처절한 항거를 가슴 깊이 새긴 그는 1921년 민족 교육의 온상으로 유명한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선배 안익태 등과 함께 신극(新劇) 운동을 펼치다 동맹휴학 사태를 맞아 송도고등보통학교로 전학했다. 1926년 석주명은 농업으로 진로를 정하고, 일본의 농학 명문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농학과에서 1년을 공부한 뒤 박물과로 전공을 바꿔 농생물학을 공부했다. 농작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응용곤충학을 배우면서, 인류가 생긴 이래 가장 먼저 발달한 학문인 나비와 꽃의 세계에 눈을 떴다.

1929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한 석주명은 영생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1931년 송도고등보통학교로 옮겨 박물 교사로 근무했다. 나비를 연구하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지도해줄 스승도, 참고할 문헌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석주명은 우선 나비채집부터 시작했다. 자신의 몸만한 자루를 매고 키만한 장대를 휘두르며 산과 들의 나비를 쫓았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제자들이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갈 땐 나비채집을 숙제로 내줬고, 어쩌다 희귀한 나비를 잡아 온 학생은 졸업할 때까지 박물 점수는 수(秀)를 줬다고 한다. 십 년 후 석주명이 송도고보를 떠날 때 그의 연구실에 보관 중인 나비표본은 60만 마리였다고 한다.

석주명 연구의 독보성은 엄청난 채집량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가능한 많은 나비를 채집한 다음, 나비의 모든 구석을 샅샅이 재고, 객관적인 형질을 추출해 통계를 내는 생물학적 발품이 석주명 연구의 원천이었다. 1933년 석주명은 『조선박물학회잡지』에 은점표범나비의 3개 아종명이 동종이명임을 발표하면서 한국 나비의 계보를 독자적으로 정립해 갔다. 1936년 석주명은 한국에서 가장 흔한 배추흰나비의 개체변이 연구를 발표했다. 그는 총 16만 7,847개체를 표본으로 날개의 형태·무늬·띠의 색채·모양·위치·앞날개 길이에 따른 정량적 형질을 추출해서 한국 나비의 동종이명 20개를 제거했다. 석주명은 학자 인생 동안 무려 75만 개체를 표본으로 잘못된 한국 나비의 아종·변종을 추려내고 동종이명 844개를 제거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1950년 10월 6일 석주명은 과학박물관의 재건 회의에 참석하러 가다 의문의 총격을 당해 안타깝게 세상을 떴다. 석주명이 몹시 아꼈던 원고는 1973년 『한국산 접류(蝶類)분포도』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세계적인 나비학자 석주명이 향파 선생이 점심을 먹었던 우춘관의 석 사장 아들이란 사실이 새삼 흥미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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